스페인 나바라의 명성, 파고 드 시르서스를 만나다
스페인의 와인이라고 하면 리오하나 루에다, 프리오라트 같은 지역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와인 애호가라면 한 번쯤 주목해야 할 지역이 있습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 지역, 나바라(Navarra)입니다. 이곳은 과거부터 강력한 왕국의 중심지였을 만큼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며, 최근에는 그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와인들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파고 드 시르서스(Pago de Cirsus)가 있습니다.
파고 드 시르서스는 나바라 남부에 자리 잡은 약 200헥타르 규모의 웅장한 와이너리입니다. 'Pago'는 스페인어로 특정 지형과 미세 기후를 가진 고급 포도원을 의미하는데, 이곳은 그 이름에 걸맞게 독자적인 테루아르를 지키며 개성 넘치는 와인을 생산합니다. 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Single Vineyard Oak Aged)' 라인은 와이너리의 철학과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2019 빈티지를 중심으로 이 매력적인 와인을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정체성의 시작
이 와인의 이름은 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싱글 빈야드'는 특정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포도원의 독특한 풍토가 와인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크 에이지드'는 오크통에서의 숙성 과정을 거쳤음을 말해주죠. 파고 드 시르서스는 프렌치 오크를 주로 사용하며, 약 10%의 아메리칸 오크를 블렌딩하여 복잡하면서도 균형 잡힌 향과 맛을 창출합니다.
주요 품종은 스페인의 대표 품종 템프라니요(Tempranillo)에 멜롯(Merlot)과 시라(Syrah)를 블렌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나바라 지역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템프라니요는 구조감과 산도를, 멜롯은 부드러운 과일감과 탄닌을, 시라는 깊은 색상과 향신료 같은 매력을 더해 최종적으로 풍성하고 다층적인 와인을 완성합니다.
2019 빈티지, 한 병에 담긴 시간의 맛
2019년은 스페인 전반적으로 매우 고른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 해로 평가받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일교차, 수확기 전반에 걸친 안정적인 기후 조건이 우수한 포도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파고 드 시르서스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2019는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 아래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와인 전문가 제임스 슈클링(James Suckling)은 이 2019 빈티지에 90점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같은 와인의 2022 리뷰(89점)보다 높은 점수로, 2019년의 뛰어난 품질을 반증합니다. 그의 평은 보통 검은 과일의 향, 부드러운 탄닌, 균형 잡힌 산도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바로 이 와인의 핵심 매력 포인트입니다. 병을 개봉하는 순간 코르크와 병입구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블루베리와 같은 검은 과일의 아로마는 많은 음미 노트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음미 노트와 페어링 추천
깊은 루비 색상을 띠는 이 와인은 코를 맞드는 순간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합니다. 익은 블랙체리, 블루베리, 자두와 같은 검은 과일의 향이 선두를 달리며, 그 뒤로 오크 숙성에서 비롯된 바닐라, 카라멜, 약간의 스모키한 느낌이 우아하게 어우러집니다. 입안에서는 풍부한 과일 맛이 선명하게 느껴지며, 부드럽지만 잘 짜여진 탄닌이 입안을 감싸줍니다. 산도는 드라이한 느낌을 주지만 날카롭지 않아 전체적인 균형을 완성합니다. 여운은 중간 이상으로 지속되며, 은은한 향신료와 미네랄 느낌을 남깁니다.
이런 풍부한 맛과 향, 탄탄한 구조를 가진 와인은 강한 맛의 요리와의 페어링이 환상적입니다.
- 그릴에 구운 붉은 고기: 스테이크, 양갈비, 라자냐 등과 함께하면 와인의 탄닌이 고기의 지방과 부드럽게 반응합니다.
- 숙성 치즈: 마농체고, 그라나 파다노 같은 경질 치즈가 와인의 풍미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 스페인 전통 요리: 나바라 지방의 스튜나 코시도(끓인 요리)와도 잘 어울립니다.
파고 드 시르서스의 수상 이력과 빈티지 비교
파고 드 시르서스 와이너리는 그 품질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2009년에는 'World Ranking Wine & Spirits'에서 세계 최고의 와이너리 95위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일 와인이 아닌 와이너리 전체의 역량을 평가받은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표는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라인의 여러 빈티지에 대한 정보와 특징을 정리한 것입니다.
| 빈티지 | 주요 품종 | 제임스 슈클링 점수 | 음미 노트 특징 | 추천 음식 페어링 |
|---|---|---|---|---|
| 2010 | 템프라니요, 멜롯, 시라 | 정보 없음 | 블렌딩의 균형이 잘 잡힌 클래식한 스타일 | 구운 양고기, 버섯 리조또 |
| 2013 | 템프라니요, 멜롯, 시라 | 정보 없음 | 개봉 시 강렬한 블루베리 아로마, 드라이하고 구조감 있는 맛 | 스테이크, 훈제 치즈 |
| 2019 | 템프라니요, 멜롯, 시라 | 90점 | 생생한 검은 과일, 부드러운 탄닌, 우아한 오크, 뛰어난 균형 | 그릴 스테이크, 양갈비, 숙성 치즈 |
| 2022 (평가년도) | 템프라니요, 멜롯, 시라 | 89점 | 접근성 좋은 과일 맛, 부드러운 입감 | 파스타, 버거, 약한 향의 치즈 |
지금 바로 즐기기 vs 장기 숙성 기다리기
파고 드 시르서스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2019는 현재 음미해도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프렌치 오크의 영향이 과하지 않게 균형을 이루고, 과일의 생생함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기와 접촉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더욱 열리고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데칸팅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 해주는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이 와인의 진정한 잠재력을 보고 싶다면 3-5년 정도 더 숙성시켜 보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1차적인 과일 향은 다소 누그러지고, 더 복잡한 3차 향(가죽, 토양, 트러플 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탄닌은 더욱 부드러워지고, 전체적인 맛의 융합도가 높아져 더욱 고급스러운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적정 온도인 16-18°C에서 보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바라에서 온 특별한 선물
리오하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나바라 지역은 이제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와인 세계의 지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파고 드 시르서스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2019는 그러한 나바라의 변화와 가능성을 증명하는 산물입니다. 단순히 강렬한 오크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포도 본연의 특성과 테루아르를 존중하며 세심하게 만들어진 이 와인은, 스페인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와인 컬렉션에 한 가지 빈티지를 추가하고 싶거나, 혹은 스페인 와인의 새로운 지평을 탐험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와인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한 병에 담긴 나바라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와이너리의 열정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파고 드 시르서스 싱글 빈야드 오크 에이지드 2019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한 지역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매개체이자,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는 숨겨진 보석입니다.